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문단 편집) ===== 세르비아 분할 ===== [[1915년]] [[12월]] 말, 세르비아 공세가 성공할 기미를 보이자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이하 동맹국은 세르비아를 분할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불가리아는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 왕국]]이 점령한 [[마케도니아]] 전역을 탈환받을 것을 요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제국 역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완공을 위해 세르비아를 제거할 필요가 있을 뿐 세르비아 왕국의 영토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불가리아에게 세르비아 왕국령 마케도니아 지역을 모두 양도하고 남은 지역을 합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는 모라바(Поморавље) 능선을 경계로 세르비아의 영토를 분할했다. [[1916년]] [[1월 1일]], 콘라트는 [[베오그라드]]에 세르비아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정]]통치를 실시했다. 그로부터 5일 뒤, 콘라트는 크로아티아 출신 장교인 요한 폰 잘리스지비스(Johann von Salis-Seewis) 장군을 세르비아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세르비아를 정복했지만 전후 처리 문제와 앞으로의 전쟁 목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콘라트의 요청으로 내각과 군부는 [[1916년]] [[1월 7일]]에 합동 장관 회의를 연다. 가장 큰 쟁점은 세르비아 왕국을 제국에 포함시킬지가 화제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함께 세르비아 침공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세르비아를 이중군주국에 합병하지 않을 것을 내세웠던 헝가리 총리 [[티서 이슈트반|티서 이슈트반 백작]]은 당초 제안대로 세르비아를 제국에 합병하지 않고 그대로 냅두길 원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티서의 반대에 분노하여 티서를 편협하고 근시안적인 인물이라고 비난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세르비아를 두고 의견이 충돌한 것이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콘라트의 의견에 따라 세르비아를 합병해 버림으로써 헝가리와의 약속을 무시해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